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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가치가 높은 기업에 투자하라. -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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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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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1894~1976) 이전의 월스트리트가 투기의 장이었다면 그의 등장 이후에는 과학적 투자의 장이었다고 할 정도로 그레이엄은 주식시장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그레이엄은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투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으며, 미국 경제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그는 또 컬럼비아 대학교와 UCLA 경영대학원 등에서 30여 년 간 강의하면서 증권 분석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했다. 지금도 그가 남긴 《증권 분석》과 대중적인 투자 지침서 《현명한 투자자》, 재무 분석의 기초를 다진 《재무제표의 해석》 등은 월스트리트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현존하는 최고의 투자자’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젊은 시절 그레이엄이 쓴 책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 후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가 세운 그레이엄-뉴먼 펀드에서 일하기도 했다. 버핏이 “나의 85%는 그레이엄”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레이엄이 버핏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지금도 내재가치에 기초한 주식투자 분석에 기본적인 지표로 사용되고 있는 주가수익비율(PER)과 부채비율, 장부가치, 순이익 성장률 등은 모두 그레이엄이 처음으로 일반화한 개념으로, 버핏은 물론 존 보글과 존 네프, 마리오 가벨리, 마이클 프라이스 등 월스트리트의 대표적인 가치 투자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주식투자는 기업을 사는 것

현대적인 증권 분석의 창시자로, 또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렸던 그레이엄은 1956년 일선 펀드 운용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가치투자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장기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특히 재무제표가 무엇인지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1920년대에 젊은 그레이엄이 벌였던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투자 사례다.

노던 파이프라인은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 체제가 붕괴되면서 새로이 설립된 8개의 송유관 회사 중 하나였다. 당시 기업들은 단 한 줄짜리 손익계정과 아주 간략한 형태의 대차대조표만 공개해 아무도 정확한 재무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레이엄은 주간상업위원회(ICC)에 제출된 회계보고서를 찾아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료였다. 노던 파이프라인은 그 무렵 주가가 65달러 수준이었는데, 현금성 자산만 주당 95달러에 달했고, 매년 6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당시 월스트리트에서 노던 파이프라인이 저평가됐던 이유는 물론 아무도 이 회사의 진정한 자산 가치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새로이 등장한 유조선에 눈길이 쏠리면서 송유관 회사가 인기를 잃었던 탓도 있었다. 그레이엄은 즉시 이 회사 주식 2,000주를 매수해 2대 주주에 올랐다(노던 파이프라인의 전체 발행 주식은 4만 주에 불과했고, 최대 주주는 록펠러 재단이었다).

그는 당시 주식 투자자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재무제표를 분석해 이 회사의 과도한 잉여자산을 찾아냈고, 이를 근거로 2년간에 걸쳐 주주총회에서 노던 파이프라인 경영진과 의결권 대결을 벌여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 그레이엄이 노던 파이프라인에서 거둔 성과는 주당 110달러 이상이었는데, 이 같은 투자 수익은 다른 소액주주들에게도 정당한 이익으로 배분됐다.

그레이엄이 스스로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라고 이름 붙였던 이 같은 투자 과정은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벌어진 일이다. 1920년대까지 원래 월스트리트를 풍미했던 주식투자 이론은 다우 이론으로 대표되는 기술적 분석이었다. 한마디로 기업의 수익성이나 자산 가치는 도외시한 채 과거의 주가 흐름에 기초해 정확한 매매 시점을 포착하는 것이 주식투자의 핵심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분석은 과거의 주가 흐름과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오직 과거의 주가 움직임에만 의존해 투자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특히 아직도 많은 기술적 분석가들이 신봉하는 엘리엇 파동 이론의 경우 파동의 시발점이 어디인가에 따라 현재의 주가 움직임에 대한 분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주식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주식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기업의 소유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식을 거래한다는 것은 그 기업을 거래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기업의 가치와 수익성을 무시하고 주식시장의 과거 움직임에만 의존해 투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기술적 분석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1920년대의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은 대강세장’이 1929년 10월 주가 대폭락과 함께 종언을 고하자 뭔가 새로운 투자 방법론이 절실해졌다.

바로 이 시점에 그레이엄은 새로운 투자 이론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름 아닌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에서 그 진가를 입증했던 투자 방식이었다. 그레이엄 자신도 주가 대폭락 사태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그는 시장에 반영되는 매일매일의 주가는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투자자들의 두려움이나 욕심으로 인해 주가의 왜곡이 나타난다고 그는 믿었다. 다시 말해 투자자들이 욕심을 너무 부려 주식시장에 낙관적인 전망이 넘쳐날 때는 주가가 본래의 기업 가치보다 과대평가되고, 반대로 투자자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비관적인 전망이 주식시장을 지배할 때는 주가가 과도할 정도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레이엄은 주식시장의 이 같은 비효율성을 이용해 투자하면 투자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주가란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기업 가치를 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투자자는 투기를 하지 않는다

그레이엄은 무려 7년간의 집필 기간을 거쳐 자신의 이 같은 투자 이론을 담은 《증권 분석》을 1934년에 내놓았다. 《증권 분석》에서 그는 투자자의 수익성과 리스크에 기초해 투기와 투자를 구분했는데, 여기서 제시한 개념은 지금도 여전히 교과서 같은 정의로 인용되고 있다.

“투자란 철저한 분석에 바탕을 두고 투자 원금의 안정성과 적절한 수익성을 보장하는 행위를 말하며, 이 같은 안정성과 수익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행위는 투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특히 시장 예측에 기초해 타이밍을 노리는 행위는 투기라고 했다. 투기자는 단기적인 이익을 얻고자 한다는 점에서 주가가 상승하기를 기다리며 1년씩 버틴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투자자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현명한 투자자’는 모두가 팔고 있는 약세장에서 매수해 모두가 사고 있는 강세장에서 매도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투기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시장의 변동을 예측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데 있다. 반면에 투자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합리적인 주가로 거래되는 기업의 주식을 매수해 어떤 가치 기준으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을 만큼 주가가 높은 수준일 때까지 주식을 계속 보유하는 데 있다.

그레이엄이 《증권 분석》에서 제시한 투자 방법론은 합리적인 가격 수준, 즉 기업의 내재가치 이하로 거래되는 주식을 신중하게 선정해서 분산투자를 한다면 높은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기업의 내재가치란 사실(facts)에 의해 평가되는 확실한 자산이다. 사실이란 기업의 유동자산, 순이익, 배당금, 미래의 수익 전망 등을 말한다. 그는 특히 자산 가치가 확실한 기업의 주식을 매수한다면 주가가 하락할 위험은 크게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경영진의 능력이나 사업의 특성, 성장 전망 등과 같은 질적인 요소를 너무 강조하게 되면 투자의 안전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레이엄의 주식투자 원칙

그레이엄이 구체적으로 지적한 주식투자의 네 가지 원칙을 살펴보자. 첫째, 10~30개 정도의 종목에 분산투자를 해야 한다. 둘째, 현금 흐름이 우수하고 전망이 밝은 대형주로 투자 대상 종목을 한정해야 한다. 셋째, 적어도 20년 정도의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배당금을 지급한 기업이라야 한다. 넷째, 주가는 최근 1년간 주당 순이익의 20배, 7년간 평균 주당 순이익의 25배를 넘지 않아야 한다.

189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레이엄은 한 살 때 미국 뉴욕으로 건너왔다. 독일계로 그로스바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가난하게 생활해야 했다. 1914년 컬럼비아 대학 졸업 후 교수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월스트리트의 증권 중개 회사인 뉴버거 헨더슨 앤드 로브에 입사해 증권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그가 월스트리트에 첫발을 내딛던 1910년대 중반까지도 주식을 거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투기자’라 불렀고, 주식 거래를 경마 같은 도박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이 시기에 그레이엄은 가치 평가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또 <월스트리트 매거진>의 금융 필진으로 일하면서 주식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1920년 뉴버거 헨더슨 앤드 로브의 파트너로 승진해 투자 연구 부서의 책임자가 된 그레이엄은 증권 애널리스트로 성공하지만 세이볼드 타이어의 투자 실패를 통해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1920년대의 대강세장이 시작되면서 그레이엄은 9년간 일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1923년 그레이엄 코퍼레이션을 세워 독립한다. 이 회사가 그 후 그레이엄-뉴먼 투자 회사(뮤추얼펀드)로 발전하게 된다.

그레이엄 역시 미국 증시 대폭락 다음해인 1930년에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가 50%나 손실을 입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 후 5년간 급여를 받지 않고 강의와 저술, 컨설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펀드를 유지한 끝에 1934년 《증권 분석》이라는 기념비적인 저작을 내놓았다. 또 주식시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1932년에는 〈포브스〉에 ‘미국 기업은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 있는가?’라는 연재물을 실어 상장기업 대부분의 주가가 청산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1954년에 그의 제자 워런 버핏이 그레이엄-뉴먼 펀드에 합류하지만 2년 뒤 펀드를 해산하고 비벌리힐스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곳에서 그레이엄은 강의에 전념하는 한편, 증권 애널리스트의 전문직화를 위해 재무분석사연합(The Financial Analyst Federation)을 설립한다. 80세가 되던 1974년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세를 보이자 ‘초저가 세일 가격’에 주식을 살 것을 촉구하기도 했고, 1976년에는 레아-그레이엄 펀드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그 해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사망한 1976년에 워런 버핏은 파산 위기에 처해 있던 게이코(GEICO)에 대규모로 투자해 마침내 버크셔 헤더웨이의 주력 회사로 키우게 된다. 게이코는 다름 아닌 그레이엄-뉴먼 펀드가 1948년에 처음 발굴해 큰 투자 수익을 올렸던 보험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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